군산제일고를 졸업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 하심으로 광주신학교에 가기로 했다. 맨 먼저 청운의 꿈을 가지고 광주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섬기시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시던 한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하나님 뜻이 아니었는지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광주신학교 교장이시던 박종삼 목사님을 찾아갔다. “나는 너를 잘 모르지만 네가 분명히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것 같구나. 광주신학교를 1등으로 합격해라. 그러면 너를 믿음의 아들로 삼겠다. 지방신학교이긴 하지만 몇 명의 탁월한 경쟁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2등 3등 하기는 쉽지만 1등으로 입학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수험생 중에는 육군사관학교 중퇴자나 전남대 의대 중퇴자 등이 있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1등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박 목사님은 나를 친 아들처럼 아끼고 돌봐주셨다. 집에서 쫓겨나 신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다. 120원짜리 식권 살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학교 강의실에 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광주신학교 시절 큰 도움을 받은 은사 고 박종삼 목사.
그때 박 목사님은 당시로는 큰돈이었던 5000원, 1만원, 심지어는 2만원을 주셨다. 그리고 “강석아, 굶으면 안 된다. 책을 못 사보는 한이 있더라도 굶지 말고 꼭 밥을 먹어라”고 하시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다가 가끔 사택에서 쇠고깃국을 끓이는 날이면 불러 주셨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쇠고깃국을 뜨실 때 목사님과 아들 그릇에는 쇠고기 건더기를 듬뿍듬뿍 주시는데 내 그릇엔 무 건더기와 국물만 가득 담아 주셨다. 무안하고 창피했지만, 밥을 얻어먹는 주제에 뭐라 말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국물만 떠먹었다.
그때 목사님은 국에 있는 쇠고기 건더기를 다 떠서 나에게 주셨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의 국에 있는 건더기까지 떠 주셨다. 연세 드신 어르신이시니 고춧가루 묻고 밥풀이 주렁주렁 달린 숟가락으로 말이다.
그러면 사모님께서 목사님께 눈을 흘기면서 다시 목사님과 아들의 국그릇에 고기를 떠 줬다. 그러면 목사님은 또 그 고기를 떠서 나에게 주셨다. 목사님의 그 사랑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눈물을 훌쩍거리며 눈물인지 국물인지 알 수 없는 쇠고깃국을 삼켰다. 그러자 목사님은 나의 등을 토닥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석아, 울지 말고 많이 먹어라. 앞으로 큰일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때 뜨거운 쇠고기 국물을 목젖으로 넘기며 마음 깊이 다짐했다. ‘나도 나중에 꼭 춥고 배고픈 이들의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고 외로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리라. 언제까지나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가 되리라.’
훗날 목사님은 정치 인사들의 공격으로 신학교에서 밀려나야 할 상황이 되었다. 목사님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내려놓고 미국으로 향하셨다. 미국으로 가시면서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남기셨다.
“첫째, 오직 지금처럼 하나님만 사랑하는 진실한 목사가 되어라. 둘째,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가 되어라. 셋째, 남 죽이는 정치꾼이 되지 말고 언제나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 되어라.”
그때 내 나이 스물하나였다. 목사님은 스물한 살 신학생에게 세 가지 당부 말씀을 하시고 자신의 저서 맨 앞에 이렇게 써 주셨다. “존경하는 소강석 목사님 혜존, 부디 큰 종이 되소서! 작은 종 박종삼 목사 올림.” 그러니 내가 어찌 평생 박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미국 가셔서도 “한국에 가난한 신학생이 있는데 이 사람을 후원하여 키우면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찾아와서 인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모금 운동을 해서 돌봐주셨다. 당시 누구도 나를 돌봐주고 지켜준 사람이 없었는데 박 목사님은 미국에 가서도 도움을 주셨다.
목사가 되어 맨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목사님을 찾아뵈려고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이미 필라델피아 어느 묘지에 누워계셨다. 차가운 묘지 땅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또 울었다. 점심 사 먹을 돈이 없어 배를 곯고 있던 가난한 신학생을 데려다가 따뜻한 쇠고깃국을 먹여 주시던 목사님. 그분이 내 가슴에 남기고 간 사랑과 섬김은 여전히 내 안에서 뜨거운 국밥 한 그릇으로 끓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값싼 동정이 아닌 눈물의 사랑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의 손길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 후로도 미국 동부를 갈 때마다 목사님의 묘지를 찾아가 헌화하고 사모님을 찾아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서울에도 신학교가 많지만 광주신학교로 가게 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박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사랑과 섬김의 스피릿을 내 안에 넣으려는 뜻 말이다. 그분의 교훈을 따라 지금껏 사랑하며 섬기는 목회를 해 왔다. 그리고 아무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한국교회의 공적 사역을 펼치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