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근래 한국 교회 중에서 담임목사의 세습으로 시끄러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 어떤 교회는 목사의 세습을 놓고 사회적인 이슈로 인하여 교단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코로나 19”로 인하여 잠잠해진 상태이다. 그러나 교회의 세습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정리해야 될 것 같아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세습"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습”이라는 용어에 대한 악용은 이 시대가 만들어 놓은 정치적 프레임에 불과하다. 이것은 라프로쉬망(rapprochement)의 일종인 PC (political correctness) 운동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한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 용어는 현대에 새로이 등장한 정치적, 신학적 용어이다.
“라프로쉬망”이라는 말은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대로 해체주의를 주장했던 쟈크 델리다(Jacques Derrida)와 마이클 포컬트(Michael Focault)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된 용어로, 이들은 기존의 교리와 윤리체계를 해체하고 “상호평등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들의 동성연애에 대한 옹호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성경이나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상대적이기 때문에, 남을 비난 또는 비판하거나 고치려고 해서는 안 되며, 평등한 입장에서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소위 “화해주의”가 그들의 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현대사상의 영향으로 세습도 평등이 아니라 대를 잇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습"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문제이다. 바울 사도의 말을 빌리면 “주의 명령이 아니라 나의 권면”이라는 뜻이다(고전 7:12).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세습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론적으로 볼 때에, 부정적인 생각이 더 많다. 다만 성서적으로 세습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 문제를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성서적으로 볼 때에 세습은 절대적인 근간교리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따라 신앙양심으로 결정할 수 있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에 속한 것이다(고전 7:12; 골 2:16-17). 아디아포라의 의미는 “근본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뜻이다.
성경말씀은 세 가지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고, 둘째로 공동체생활 이야기와, 셋째는 개인적인 경험이야기이다. 물론 “세습”에 관한 이야기는 공동체생활 이야기이다. 이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도 아니라는 뜻이다. 신학적으로 정리하자면, 성경말씀은 크게 믿음의 교리와 행위의 윤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세습”은 천상윤리가 아니라 지상윤리에 속한 부분이다. 물론 이 지상윤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이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근간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황에 따라 크리스천의 양심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말이다(딤전 1:5).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상윤리에 따른 지상윤리라는 뜻이다.
이것을 성경의 율법(律法)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식법과 시민법을 의미한다. 성경의 율법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전혀 변하지 않는 도덕법과,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 의식법과 시민법등이 있다. 특히 도덕법은 율법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명령으로 십계명과 같은 것이고, 의식법(제의법, 절기법, 관혼상제, 기타 행사)과 시민법(형법, 민법, 상법 등등)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법이다. 만일, 구약시대라면 의식법에 속하는 제사법과 제사장의 세습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제 구약시대의 예법은 개혁되어야 하는 것으로(히 9:1-10), 인간의 공동체의 의식과 질서를 위한 법을 말한다. 이 중에서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세습과 같은 것은 교회공동체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의식법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헌법과 교회규약에 해당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세습논쟁에 국가(정부)나 시민단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의지에 맡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습논쟁”(?)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인들과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소위 “세습”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결의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결정되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와 사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 이를 어찌할꼬?” 바울의 결론은 간단하다. 비록 “세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고 합법적으로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교회와 사회에 덕을 세우지 못할 경우에는 재고하라는 것이다(고전 10:23; 롬 14:19; 고전 7:). 그 교회에 아들 말고는 적격자가 없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소위 “세습”을 하고도 아주 평안하고 은혜롭게 성장하는 교회도 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담임목사와 아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교인들의 강권에 의해서, 심지어 당회에서 장로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교인들이 찬성하여 아들을 후임으로 강권하여 세습이 이루어지는 교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교회는 어찌해야 할까? 물론 그 결과가 나쁜 쪽으로, 심지어 시험에 드는 교회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는 물론 세습에 실패한 교회라고 본다. 이런 경우를 우려해서 교회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세습”은 본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다. 소위 “세습”은 교회의 고정된 교리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사회의 유익과 덕을 위한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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