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 "개척자 언더우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 "개척자 언더우드"

오인숙 2022-04-15 (금) 22:14 2년전  

개신교 선교의 시작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 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아펜젤러 부인은 나란히 증기선에서 내려 작은 거룻배에 짐과 함께 옮겨 타고 얕은 파도를 가르며 뭍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다. 이교도의 땅에서 죽음도 불사한 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 언더우드에게 선교는 어릴 때부터의 소명이었고, 어느 날 조선은 그에게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 현장에 발을 디디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들은 조선의 정세는 제물포항의 짙은 안개처럼 불안감으로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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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룻배를 타고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가족.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었다. 그러자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중국 청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압박해 들어오는 것을 경계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고, 1882년 5월 조선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 뒤 옛것을 지키려는 수구파와 변화를 갈망하는 개화파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이 일어나는데, 1882년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키면서 그러한 대립이 수면 위로 터져 올랐다. 하지만 그 결과 조선은 같은 해 8월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10월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새로운 불리한 조약들만 잔뜩 체결하게 되는 등 정세는 점차 악화 일로에 서게 된다.

19세기 조선을 무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한건 비단 일본과 중국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위용을 더욱 떨치기 위해 조선에 군함을 보내며 자신들의 세를 드러내려 했고,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반도로 슬금슬금 내려 왔고, 영국은 이를 막겠다고 거문도를 점령했다. 바야흐로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내적으로도 일본이 조선의 미곡을 다량 수입해 가자, 곡물 가격이 뛰고 미곡 품귀 현상이 벌어지는 등 조선의 농촌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 결과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대내외적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1884년 9월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바로 옆 중국에서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불평등조약이 체결될 때 통역이나 고문 등의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에도 치외법권 등 불평등조약을 이용해 교인들의 여러 송사에 개입하거나 불법 이득을 취하는 사례가 번번이 발생한 바 있다. 이에 중국인들은 기독교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고, 분개한 중국 민중이 공사관 직원뿐 아니라 선교사들까지 공격하는 사례가 19세기 내내 ‘교안’, 즉 반기독교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수백 차례 발생했다. 따라서 아시아 각국에 설치된 서구의 공사관 직원들에게 선교사들은 언제 말썽을 일으킬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언제 또 폭 동이 일어날까 늘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중국인들이 분개한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주의의 침탈이었지만, 공사관 외교관들은 서양인 가운데 현지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선교사들이 문제라며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었고, 중국인들도 자기 주변에 함께하는 선교사들을 손쉬운 분노 표출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19세기 피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자국 공사관에도 치이고, 현지인들에게도 치이는 아픈 시대의 경계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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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N. 알렌.

알렌은 조선에 오기 전 1년가량 중국에서 활동한 바 있는 선교사 였기에,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알렌이 중국에 입국하기 10여 년 전, 톈진(天津)에서는 20여 명의 서양인들이 살해되는 큰 반기독교 폭동이 일어났고, 중국인들은 늘 알렌을 포함한 서양인들을 백안으로 노려봤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지역사회 안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다. 타고난 성품과 신학적 경향에서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이러한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알렌은 조선에 온 이후에도 안전을 지향하는 간접 선교 방식을 고수하게 된다. 경계선만 살살 밟으면서 조심하고 몸을 사렸다.

알렌이 조선에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의사’ 자격 덕분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미국의 여러 선교단체들은 조선의 문이 열렸다며 몸이 달아올랐고,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답사를 진행하는 등 선교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노력했다.

이때 가장 먼저 조선을 방문한 것은 중국 내지회 소속 의료 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illiam Douthwaite)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부탁을 받고 1883년 10월 부산으로 입국하여 6주간 부산, 원산, 인천, 서울을 두루 살펴본 뒤, 《조선의 상황(Notes on Corea)》이라 는 얇은 조사 보고서를 1884년 출판했다. 책에서 그는 조선의 도시 풍경, 건물 구조, 상업 구조, 외국과의 선편 등을 자세히 적었고, 마지막으로 조선의 종교로서 조상숭배와 풍수지리, 샤머니즘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그 뒤를 이어서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북감리회 소속 매클레이 (Robert C. Maclay) 선교사가 조선을 방문하는데, 1884년 6월이었다. 이때 매클레이는 일본에서 연을 맺은 김옥균을 통해 선교 허락 요청 서한을 고종에게 보낼 수 있었고, 기적적으로 고종이 ‘교육’과 ‘의료’ 에 한하여 선교사들의 활동을 허락한다는 선교 윤허를 내리면서 드디어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에 주재하며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종의 윤허가 내려진 날이 1884년 7월 3일이었는데, 이렇게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그 문으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가 바로 9월 20일 입국한 알렌이었다.

알렌은 자신의 활동 범위가 ‘의료’ 혹은 ‘교육’으로 국한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입국 당시 알렌의 공식 직함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전속 의사였다. 입국하자마자 알렌은 정동에 있는 미국 공사관 바로 옆 한옥 한 채를 사서 수리했다.

정동에 쪼르르 모여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각국 공사관 직원들은 알렌의 입국을 두 손 벌려 환영했다. 이제까지 서울에는 서양 의사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사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여러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고, 병이 심해지면 일본이나 중국 상하이로가 치료받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 의사가 왔으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알렌은 내한 후 집수리하랴, 서양인들 돌아가며 진료하랴, 후발 선교사가 사용할 집 구하러 다니랴 정신없는 날을 보냈고, 두 달 뒤 드디어 집수리를 마치고 가족을 모두 중국에서 데려와 이제 겨우 한숨 돌리려고 하는 찰나인 12월 4일, 다시 한번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개화파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수구파 거물들을 처단하는 거사를 단행했고, 신정부 각료를 구성하며 성공한 듯 보였지만, 이틀 후인 12월 6일 청국의 병력이 들어와 진압 하면서 개화당의 정변은 3일 천하로 무너지고 말았던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역사다.

그런데 그때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쓰러진 수구파 일원 가운데 한 명이 천행으로 현장에서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이었다. 머리 뒤쪽과 목, 가슴, 팔 등 전신에 수 십 군데 자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민영익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에 의해 발견되었고,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서울에 단 한 명뿐인 서양 의사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총 27군데의 자상을 깨끗이 소독하고 꿰매고, 심을 받고, 붕대를 감는 등 한방 치료와는 전혀 다른 의술로 민영익을 치료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치료법이었다.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은 끝에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는데, 서양 의술의 놀라움을 조선 정부와 고위 관료들이 직접 목격한 사건이기도 했다. 민영익은 알렌을 하늘에서 보낸 ‘천의’라고 추앙했다.

이후 알렌은 자신이 중국에서 그토록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기회’라는 것을 얻게 되었다. 알렌은 유명 인사가 되어 서울 장안에서 알렌의 이름 두 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민영익으로부터는 물론이거니와 왕과 왕비로부터도 감사 편지와 선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왕실의 전속 의사로도 임명되어 1885년 3월 27일에는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고종과 민왕후를 진찰 했다. 고종은 알렌에게 점차 건강 문제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고, 알렌이 궁에 들어가는 수도 늘어났다. 그러자 일본 공사관측에서도 고종의 최측근이 된 알렌을 자신들의 촉탁 의사로 청빙하는 등 서로 줄을 대려는 정동 일대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알렌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공사관을 통해 공식으로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 허가원을 제출했는데, 언더우드가 증기선을 타고 남해안을 돌아 제물포로 향하고 있던 바로 그때인 1885년 4월 3일, 병원 설립에 대한 고종의 공식적인 허가가 내려졌다. 언더우드는 바로 그러한 격변과 기회의 순간, 제물포항에 닿았다. 조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선교를 향한 사명은 안개를 뚫고 비추어 결국은 안개까지 몰아내는 강한 태양빛처럼 언더우드의 마음을 비추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출처 : 풀가스펠뉴스(http://www.fg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