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과 목민심서(사진_매일경제) ©편집인 |
서양사회를 지탱해온 것이 기사도정신이라면, 동양사회를 유지해온 것은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의 핵심은 공렴(公廉)이다. 공렴은 성품과 행실이 공정하고 청렴(Integrity)하며 강직함을 뜻한다. 아무리 청렴해도 업무에서 ①편 가르기와 ②이중잣대와 ③내로남불을 한다면 부패(Corruption)보다 그 피해가 더 크다. 그래서 공렴해야 한다. 공렴이 시대정신(Zeitgeist)이다
다산은 지금부터 232년 전인 1789년(정조 13) 3월 10일 전시(殿試)에서 갑과 2위로 합격했다. 당시 28세였다. 이해 정월 27일 문과에 급제하여 희정당에서 정조대왕을 뵙고 물러나와 지은 시의 일련을 보자.
무능해서 임무수행 어렵겠지만(鈍拙難充使)
공렴으로 정성다해 충성하리라(公廉願效誠)
28세의 다산은 공렴한 공직자가 되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그는 11년간 벼슬하는 동안 이 약속, 공렴을 철저하게 지켰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목민관의 본무(本務)이자 모든 선(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않고 목민관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청렴은 목민관의 본연의 임무로 모든 선과 덕의 원천이자 뿌리라고 했다. 청렴하지 않고 목민관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다산은 “옛날부터 무릇 지혜가 깊은 선비는 청렴으로써 교훈을 삼고 탐욕으로써 경계를 삼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직 선비가 청렴해야하는 것은 처녀의 순결과 같다”고 했다.
다산은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어서 “지혜가 높고 사려가 깊은 사람은 그 욕심이 크므로 청렴한 관리가 되고, 지혜가 짧고 사려가 얕은 사람은 그 욕심이 작으므로 탐관오리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청렴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청렴이 이익이 가장 많이 남는 장사라고 했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생활의 3자의 비결은 ①청(淸), ②신(愼), ③근(勤)이라고 했고, 『상산록』(象山錄)을 인용하여 청백리를 3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 최상의 청백리는 ①봉급 이외에는 일체 먹지 않고, ②먹고 남은 것도 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으며, ③벼슬을 그만둘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고 한 필의 말을 타고 집으로 시원스럽게 가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에 말하는 청렴한 관리(廉吏)이다.
둘째, 다음 청백리는 ①봉급이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②명분이 바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으며, ③먹고 남은 것은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청렴한 관리이다.
셋째, 최하의 청백리는 ①이미 규례(規例)가 있는 것은 비록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지만, ②규례가 없는 것은 죄를 먼저 짓지 않고, ③향임(鄕任)의 자리를 팔지 않으며, ④천재를 입은 전답에 세금을 감하는 재감(災減)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번롱하지 않고 ⑤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팔아먹지 않으며 ⑥조세를 더 부과하여 나머지를 착복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염리(廉吏)이다.
다산은 이어서 “모든 악을 갖춘 자가 지금 도도한 대세를 이루고 있다. 능히 최상을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만 능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 다음 것을 해도 좋다. 소위 최하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옛날에 있어서는 반드시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을 당했을 것이다. 무릇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부하를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뿐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나오고 신뢰는 성실에서 나오는 것이니, 성실하고도 능히 청렴해야 뭇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했다. 위엄은 청렴에서 신뢰는 성실에서 나오는 만큼, 성실하고 청렴해야 아랫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했다.
다산은 목민관이 아무리 학문이 높고 청렴해도 무능하고 부하들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돌아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