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경 종교부 차장
2015년 2월 인터넷에선 드레스 색깔 논쟁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 가수 케이틀린 맥네일이 SNS에 한 벌의 드레스 사진을 올린 뒤 사람들은 이 드레스 색을 두고 갈렸다. ‘흰 바탕에 금빛 줄무늬’라고 주장하는 흰금파와 ‘파란 바탕에 검은 줄무늬’라는 의견을 내는 파검파였다. 같은 사진을 두고 해석이 극명하게 갈린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됐고 뉴욕타임스, BBC 등 언론은 전문가들의 과학적 설명까지 곁들여 보도했다. 파란색을 감지하는 민감성이 사람마다 달라서라는 주장, 색을 판단하는 빛 정보가 SNS에 올린 드레스 사진엔 충분하지 못해 오류가 발생했다는 주장 등이 나왔다. 어찌됐건 이 논쟁은 해당 드레스를 만든 회사가 파란 바탕의 검은 줄무늬라 말하며 일단락됐다.
이 논쟁이 최근 다시 회자된 건 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바이든’과 ‘날리면’으로 갈려 사람들은 입씨름을 했다. 파검파·흰금파와 바이든·날리면 논쟁은 과학 이론을 동원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별개로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확인시켰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고 듣기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거다.
최근 한 행사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개천절인 지난 3일은 가을비치고는 꽤 많은 비가 내렸다. 휴일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5000여명의 사람들이 우비를 입고 서울광장에 모였다. 걷기 행사였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참가비까지 내가며 도로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성경 말씀에 따라 참가비 전액을 복지사각 지대에 있는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는 취지에 공감했고 동참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행사 참가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 행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어떨까. 광장 주변을 오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꽤나 긍정적이었지만 의외의 반응도 있었다.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며 행사 취지를 의심하는가 하면 일부 교회와 목회자의 일탈을 거론하며 기독교 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 중에도 한국교회를 힘들게 했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소외 이웃을 돕기 위해 나선 교회와 성도들은 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쯤 남대문 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외국인 관광객의 시선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 스페인 여성은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는 말에 공감하며 “교회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걷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응원했다.
교회를 향한 ‘보았던 대로, 들었던 대로’의 편견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고민할 때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예전에 했던 말이 간결하게 정리해줬다. 사람은 세상을 볼 때 ‘기억’과 함께 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교회에 대한 많은 사람의 주관적 시각과 청각에 굳이 비관할 필요도 없었다. 노르웨이 지폐 1000크로네에 담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얼굴과 그의 작품을 통해서다. 모두의 예상을 깨는 건 지폐에 담긴 뭉크의 작품이다. ‘절규’가 아니다. ‘태양’이다.
어머니와 형제를 잃었고 아버지까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평생 죽음을 마주했던 뭉크의 인생은 절규와 맞춤이었다. 실제 삶도 그랬다. 우울증에 대인기피증을 겪었으며 외로움을 느끼고 비관했다. 그의 삶에 변화를 준 건 고흐가 프랑스 생레미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다. 뭉크는 자신만큼이나 힘들었음에도 희망을 그린 고흐를 봤다. 이후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렸고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벽화에 “나는 계속 죽음을 그렸지만 여기 오는 학생들은 절망보다 희망을 보기 원한다”며 지폐에 담긴 ‘태양’을 그렸다. 절규를 그리고 20년 뒤였다.
뭉크가 자기만의 시선으로 고흐의 작품 안에서 희망을 봤다면 이제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주관적 시각에서 비관과 비판이 아닌 긍정과 희망을 보도록 그 시선을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고백하건대 논쟁의 드레스 사진을 본 기자는 흰금파였고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
오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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