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영 박사 칼럼, 까다로운 사람과 구제 불능인 사람 (2) (Difficult People and Impossible People)

장부영 박사 칼럼, 까다로운 사람과 구제 불능인 사람 (2) (Difficult People and Impossible People)

이창희 2022-11-03 (목) 09:44 2년전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이번에도 보수층에서는 당 대표자 문제로 엄청난 정치적 상처와 손해를 보고 있다. 처음에 이OO을 거대 야당 대표로 세우려 할 때, 필자는 극구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본인의 인성(본성)과 인격성의 문제, 둘째, 본인의 정체성(확고한 이념)에 대한 불신, 셋째, 인간(도덕/인격) 교육의 부실, 넷째, 국회의원 3번 낙방으로 의원 활동 경험 부족,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거대 야당의 리더로서 부적격한 점 등을 들었다.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하여 덕을 세우는 정치적 경륜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특히 머리만 굴리다 보면, 국민의 진정한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정권에 눈이 멀어 꼼수를 부려 펀 플에이(pun˗play)를 하다 보면 당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으며 격론을 벌이다가 결국, 필자는 "그러면 두고 보자, 결과가 증명해주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논쟁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무리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이라 해도 가정(family)으로부터 시작하여 각 단체생활에는 위계질서가 있는 법이며, 백번 양보해서 권위주의 타파가 중요하다 해도 윤리적인 질서가 있다는 사실과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왕을 세울 때 노인들의 경험다운 충고를 일축하고,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다가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졌고, 그 연속 선상에서 얼마나 큰 분단의 아픔을 겪었는가? 성경적으로 보면,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힘당 내부의 "불법의 요인들"을 과감하게 수술해내고 그것이 안 된다면 환골탈태하여 재창당까지도 불사해야 할 것이다.


수십 년 전, 어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할 때에 교회 핵심 멤버(core member)인 집사의 소개로 교육전도사를 채용하게 되었다. 그 전도사가 목사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피를 토하고 엎어져 죽을지라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이 지역이 빤한데 그랬다가는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라며 호언장담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담임목사는 사람들을 잘 믿는 습성이 있어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자진해서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피의 맹세(the blood oath)와는 달리 교인 중에서 유력한 멤버들을 이끌고 나가서 교회를 개척했고, 심지어 보란 듯이 교인들을 이끌고 배신한 교회 옆에까지 와서 야외행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두 교회 교인들은 피차에 어색한 태도로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까맣게 잊은 채, 서로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Rubicon River)을 건넌 꼴이 되었으니, 이를 어쩌나? 좀 늦기는 했지만, 돌이켜 회개했다면, 다시 화해할 수 있으련만∙∙∙. 그전에도 그 목사는 자신의 목회를 돕는 부목사가 교인 중에 코어 멤버(core member)를 데리고 나가 개척을 했지만, 개척한 교회의 창립기념 예배에 참석해서 축복해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전도사가 나가서 개척한 교회에서는 초청도 하지 않았고, 목사는 그 교회에 가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전도사가 반성이나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그 교회는 몇 년 후에 폐쇄되었다.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축복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배신자들이 부지기수이지만, 대표적인 배신의 아이콘(icon)은 바로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이다. 인류의 구속 주가 되시며 자기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를 배신했으니, 천하에 더 없는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 님의 열두 제자 중에 예수 님 가까이서 그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중요한 요직인 금전을 출납하는 회계의 일을 맡고 있었고, 심지어 다른 제자들과 같이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 가룟 유다가 무엇이 부족했기에 자기 스승이신 예수 님을 배신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을 떠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용서받기 어려운 배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돌이킬 수 있는 배신’과 다른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이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배신’과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배신’을 말한다. 


성경에서 돌이킬 수 있는 배신의 아이콘은 시몬 베드로(Simon Peter)이며,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의 아이콘은 바로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이다. 결말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예수를 배신했지만, 돌이켜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가룟 유다는 돌이켜 회개하지 못하여 멸망으로 들어갔다. 이 내용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기본적이며 간단한 내용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보려고 한다. 배신의 뿌리는 사탄(마귀)이다. 베드로이건 유다이건 그들 속에 배신의 마음을 넣어준 자가 바로 사탄이기 때문이다. 이 사탄이 아담과 하와 속에 하나님을 배신하는 마음을 넣어주어서 이들 역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결국, 저주받아 후손에게까지 고통스러운 인생을 물려주고 말았다. 그 사탄이 역시 베드로와 유다 속에 배신의 마음을 넣어주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치셨고, 유다에게는 “사탄이 들어갔다”라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 배신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배신의 기원, 즉 배신의 원인은 똑같이 사탄에게 있지만, 그 배신을 다루어 처신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죄를 철저한 통회와 믿음으로 극복했으나, 유다는 자신의 배신죄를 철저한 회개와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단순한 후회와 믿음이 없는 자살골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극과 극의 차이로 구원과 멸망이라는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다시 두 사람의 차이를 신학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베드로는 성격상 급하고 과격하여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인 반면에, 유다는 온순한 것 같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유약하여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마음 문을 열어놓고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준 후에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단과 하나가 되어 구제할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비정상적인 사람 중에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은 포용과 선도의 대상이 되지만, ‘구제 불능의 사람’은 선도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된다. 그 외의 사람들은 선도로 구제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나, 사회, 국가 공동체에서 ‘구제 불능의 사람’만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는 사람을 배신한 것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신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자이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창희 기자 <저작권자 헤드라인코리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