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 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서대문에 소재한 4.19혁명기념도서관 3층 정면에는 1계층을 모두 뒤덮은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4.19는 아직도 이승만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글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거센 시위대를 향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의 총탄이 퍼부어졌고 186명의 아까운 생명이 죽었으며 6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은 사퇴한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여생을 마쳤다. 이승만의 동상은 남산에서 끌어내려졌다. 그의 후계자였던 이기붕 일가는 권총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한 시대의 역사가 어느덧 63년의 세월이 흘렀다. 4.19혁명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4.19는 의거로 전락하고 5.16이 혁명으로 둔갑하여 30년 세월 우리는 군사독재의 군홧발에 짓밟혀야 했다. 그 와중에도 5.18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장엄한 발걸음이 되어 조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한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다. 4.19세대의 공이 가장 컸다고 자부한다.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에게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수여하여 그 공로를 기렸다. 100만 학도가 시위에 참여했는데 공로자는 겨우 500여 명에 불과하며 현재 생존자는 절반 정도다.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공로자를 발굴하고 있지만 극히 미미한 숫자에 그치고 있어 신청자들의 불만이 크다. 물론 신청자 전부를 모두 포상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부분 거짓은 아니다. 다만 보훈부가 제시하는 4.19 당시의 신문 잡지 교지 등에 이름과 사진이 찍힌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의 나이가 이미 생물학적으로 최고령자인 80을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가 9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4.19묘소를 찾아 영령들께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전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향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인수는 2011년도에도 4.19묘소를 찾았다가 4.19회원들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간 일이 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고 사과에 대한 사전 통고도 없었기에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해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와 관련단체 그리고 언론이 총동원되다 시피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을 건립해야 된다는 민관(民官)의 합심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지낸 분에 대해서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승만처럼 혁명의 대상이었던 사람에 대해서는 유족의 사과와 같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전제가 실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이승만기념관은 김황식건립위원장의 말대로 이승만의 잘못된 부분도 모두 전시하겠다는 확언이다. 참으로 옳은 판단이다.
이인수의 사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4.19혁명 3개 단체는 모두 정당한 회원들의 뜻을 모아야 하며 일치단결한 모습으로 이에 대응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건국포장 수상자에 대한 예우를 독립유공자와 차별하고 있는 것은 공평성을 명시한 헌법정신의 위반임을 바로 잡아야 한다. 또 다른 선진국들은 혁명기념일을 국경일로 기리고 있음을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승만과의 화해가 진정 역사에 길이 빛나기 위해서는 이승만기념관과 동시에 4.19혁명기념관도 함께 착공해야만 모든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해소된다는 것도 정부에서는 확실하게 선언하는 것이 옳다. 도서관 하나에 4.19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은 혁명의 역사정신이 아니다. 4.19와 이승만 화해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역사적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며 4.19인의 현안을 제시하여 그 뜻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