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함께 사는 세상에서
독일의 의사요 문학 작가였던 한스 카로사(Carossa, Hans 1878-1956)는 “인생은 만남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생은 나와 너의 만남이다. 만남은 나와 너의 관계의 시작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요, 만남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회(Community)는 교제(Communion)라는 어원(語原)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교제(만남)없이 사회는 존립되지 않는다. 나와 네가 만나는 우리의 마당이 사회이고 함께 사는 세상이다.
미국의 문인 에머슨(Emerson1803-1882)은 “성심성의를 가지고 남을 도와주면 반드시 나는 남한테 도움을 받는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보상(報償)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인생에는 반드시 함께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보상 작용이 있다. 우리가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아도 사회에는 인과업보(因果業報)의 법칙이 있어, 반드시 좋은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이다.
내가 성심성의로 대하면 남도 나에게 호의적(好意的)로 대하게 마련이다. 또 반대로 내가 남에게 미움으로 대하면 남도 나에게 좋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세상에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이 있는 가 살펴보자. 그리고 그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 내 몫인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잘 사는 것은 남이 갖지 못한 몫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나에게 있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줄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 할 것이다. 우리는 내가 잘 살기를 힘쓰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 함께 잘 살기를 힘써야 한다.
함께 살다.
별들은 별과 함께
산들은 산과 함께
바다는 바다와 함께
나무들은 나무와 함께
꽃들은 꽃들과 함께
새들은 새들과 함께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다함께 그렇게 산다.
세상에 외로운 것은 없다.
함께 살지 못하면 외로울 뿐이다.
-이인혁시집 “들꽃에게” 중에서-
인간은 고독(孤獨) 속에서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이 고독에 빠질 때 미치거나 비인간(非人間)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나와 네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와 너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려면 바로 살아야 한다. 바로 살지 않고는 절대로 잘 살 수 없다.
함께 사는 세상은 개인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의 통일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네가 무너질 때 나도 무너진다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속성(屬性)이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물질문명 중심의 사회는 함께 사는 희망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류와 다른 모든 생명체의 멸절(滅絶)을 가져올 수 있는 지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풍요와 편리의 삶을 추구하다가는 인류 전체가 공멸(共滅)을 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한대의 경쟁 사회에 살고 있다. 어린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친구와 경쟁을 해야 하고 원치 않는 성적 싸움에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모습은 어른이 되어서도 끊이지 않는다. 젊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경쟁의 무한 반복 속에 사람은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의 사는 모습은 여러 다른 생활의 모습으로 나타나 지게 된다. 그러므로 가족, 친구, 직장에서 나름의 역할을 다하려면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자리는 배워서 아니면 타고나야 하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소질은 어떤 분야에 대한 재능을 의미하고 기질은 사람의 성격에 관련된 말이다.
자질은 성품과 능력보다는 기능적 의미가 강하다. 어떤 업무나 책임을 맡는데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항, 즉 구비(具備) 요건이다. 그러므로 자질이란 폭넓은 식견을 겸한 품위, 품성, 품격, 인격, 인성, 지성, 기술, 영성 등이 균형 있게 조화된 훌륭한 인품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 있어서 자질에 대한 관심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사실 능력의 뛰어남보다 외모나 지식의 훌륭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인성(人性)과 품격(品格)인 것이다.
요즘 정치권이나 종교계 등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들 속에 보면 자질 문제가 심각하게 폭로되는 일들이 많다. 돈, 불륜, 도박, 도둑, 살인, 사기, 폭력, 폭언, 음행 등. 일반 사회의 흉악범들과 다를 바 없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말을 한 것을 그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그냥 없던 것으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사실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지식과 능력, 실력과 학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자질에 부족함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상처를 입고 결국 함께 사는 사회에서 누군가의 영혼이 다칠 수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벗어난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 한 개인의 잘못된 삶의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어려움에 빠진다. “개념 없는 인생”은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비극이다. 그가 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인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한 진창이 될 것이며,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들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도움을 주고 살 수 있는지를 배우고 열심히 익혀야 한다.
한 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은 현대인들의 장애문제이다. 본인 자신은 잘 모르는데 분명히 장애(障礙)가 있다. 그 자신이 성격과 인격 장애, 정신장애, 언어 장애, 행동장애가 있는지를 확인하여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아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밝은 세상을 어둡게 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의 자질과 신뢰 문제 사이에서 더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겉모양은 거룩한데, 속에는 더러움으로 가득 찬 이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정치권이나 종교계 지도자들이 이중생활(二重生活)의 행동을 보이므로 이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不信)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나라가 망해갈 때 나타나는 예고 조짐으로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요(富饒), 양심(良心) 없는 쾌락(快樂), 인격 없는 교육(敎育), 도덕 없는 상업(商業), 인간성 없는 과학(科學), 희생 없는 종교(宗敎)를 지적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원대하고 심지 깊은 대의명분(大義名分)과 철학 또는 신앙적 지주를 가지고, 꼼수를 쓰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뒤통수를 치는 편법과 탈법(脫法) 그리고 비겁함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이제 함께 사는 세상에서의 자질과 신뢰를 회복하는 길만이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행복의 나라를 건설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인 조엘 피터슨(Peterson·69)은 “지도자의 자질은 신뢰(trust)이다.”라고 말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친구, 이웃, 동료, 그리고 자기가 속한 단체 더 나가 국가와 세계에 신뢰 할 수 있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가.
요즘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과연 국가와 그 기관들을 신뢰 할 수 있을 것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우리들이 매일 대하고 있는 식품과 의학 기술은 신뢰 할 수 있는 가. 사회 전반에 불신의 벽이 커져가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는 사회신뢰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여기서 국가기관은 국회, 정부, 법원 등 통치기관만이 아니라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 경찰 등은 어떤 가.
우리 시대에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신용도가 높아져야 한다. 믿음, 신뢰, 신앙(faith)의 힘은 막강하다. 속담에 “믿음은 산도 움직인다(Faith will move mountains)”라는 말은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미국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1807~1892)은 “믿음을 잃고 명예가 죽으면 죽은 사람이다.”(When faith is lost, when honor dies, the man is dead)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부족한 자질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과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동물들은 교육이나 훈련 없이 그냥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아니 계속하여 배움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시인 에드거 게스트는 『수확과 장미꽃』에서 "원한다고 그냥 얻어지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가치도 반드시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腐敗)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들이 애를 쓰고 수행(修行)하고 적선해도 바른 삶을 살 수가 없다.
하여튼 어떤 모양이로든 사람에게는 새로워지게 되는 노력이 꼭 있어야 한다. 스승을 통하여, 책을 통하여, 드라마를 통하여 이 시대의 종교나 성직자들로부터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교훈을 받게 되고 내 삶에 변화 된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하루의 계획을 세울 것이다. 옛 사람들도 생각하기 좋은 세 곳을 가리켜 “삼상사(三上思)”라 불렀다. 침상(寢牀), 측상(廁上), 마상(馬上)이 그곳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침대 위와 화장실 안 그리고 자동차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의 계획을 세워도 그대로 실천(實踐) 실행(實行)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실천을 하되 선한 실천이 우선(優先)되어야 할 것이다. 매일 나를 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뢰로 기쁨과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하자. 언제가 남에게 베풀었던 덕행이 반드시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일을 잠시 멈추고 내 마음을 좀 비우고 걸으며 하늘을 보자. 그리고 자가(自家) 수행(修行)을 해 보자.
여행도 좋고 가벼운 산책도 좋다. 어떠하든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꽃을 피우면서 살아 갈 것이 아닌 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파란 것도 따뜻한 봄날에 꽃들이 피는 것도, 아이들이 예쁘게 자라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일이니까.
이인혁 (본지 편집국장)
월간 한국시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월간 문학세계 문학상
한국문단문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