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영 박사 칼럼, 『틀을 깨고 보니 한눈에 보이는 구원』(If You Break the Frame, You Can See Real Salvation)

장부영 박사 칼럼, 『틀을 깨고 보니 한눈에 보이는 구원』(If You Break the Frame, You Can See Real Salvation)

이창희 2022-11-25 (금) 21:17 2년전  


위의 제목은 평신도로서 성경을 전문으로 강의하고 있는 분의 저서로, 성경의 구원론에 관한 내용으로 집필한 책의 제목이다. 그는 인간의 학설, 특히 루터나 칼빈의 학설에 갇힌 프레임(frame)을 깨고 나야 성경의 구원이 올바르게 한눈에 보인다는 요지이다. 본 칼럼은 저자가 책 속에서 추출해서 나열한 핵심적인 내용과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평가한 내용이다. 


5. 책 속에서 (저자의 책)

그런데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한순간의 결심과 헌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같은 것이다. 부부가 서로 신실함으로 배우자를 지속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어느 한순간에 끝나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란 천국 티켓을 획득하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관계’의 개념인 것이다.  - p. 47

 

구원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主)되심이다. 구원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포함하고, 교회와 세상을 포함하며, 현세와 내세를 포함한다. 나아가서는 인간 세계뿐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롬 8:20-22). 그동안 구원의 의미를 좁게 이해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소개되면서 구원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즉, ‘구원’이 구원받은 것이다. - p. 65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란 현재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에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장차 동일한 은혜로 나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 p. 78


그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이 영생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 통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관계적이고 가변적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통치를 받고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5장 24절의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약속은 천국 티켓을 소유하듯이 단회적(単回的)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 약속이다. - p. 124


내가 죽는다는 것은, 한번의 죽음(get in)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죽어야 하는 것이다(stay in). 매일 죽는다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부활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stay in)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종국적으로 육체의 부활(complete in)이 주어질 것이다.- p. 190

[평가] (EVALUATION) 

역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이미...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but not yet)라는 종말론적 구도(Eschatological frame) 중에서, 'not yet'에 대한 이해와 새 관점 학파(New perspective School)의 언약적 신율법주의 구원관(the salvation by the covenantal nomism), 그리고 이신칭의에 의한 구원관(the salvation by justification by faith)에 대한 해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인간 이해력의 한계다. 


성경해석학적으로(hermeneutically) 살펴보면 아날로그(analogue) 방식을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 같이 보이나, 역시, 성경을 디지털(digital) 방식의 입체적 해석(stereological interpretation)의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으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다. 성경은 학문적인 식견은 물론, 영적인 특별한 은사(고전 12:8)를 통한 영적 통찰력(spiritual insight)이 아니면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접근방법(approaching method)인데, 위의 책에서 제목(title)을 보면, 기대되는데, 실제 내용과 결론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닌 것 같다. 


저자 역시 자기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제자 케제만(Ernst Kaesemann)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접근하여 '관계성'(relativity)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아는데(cf. 김세윤 교수), 물론,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성의 본질과 관계성 유지의 주체(the subject)가 무엇이냐? 라는 것이 최우선(top priority)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원형적 관계성(archetypical relativity)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고전 6:15-19; 엡 4:15-16; 엡 5:23-32)으로, 이는 현상적으로 하나님과의 표상적인(typological) 지상적 모든 관계 즉 인간의 윤리적 행위 관계까지 초월하여 선행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절대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원죄를 해결함과 동시에 주어진 법적, 언약적 관계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접근방식(ontological approach)이 아니라, 구조론적(structural) 즉 상황적 접근(contextual approach)의 귀납적 방식(inductive method)을 취하므로 인하여 성경해석의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God's initiative)에 따른 “칭의/중생”(justification/regeneration)과 “성숙/성화”(maturity/sanctification)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전자는 구원의 즉각성(단회성)으로 후자는 구원의 점진성(계속성/연속성)으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갓 출생한 갓난아이(중생/구원)가 성장의 과정을 통하여 성숙한 어른(성숙/구원)이 된 후에도 본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으로 단회적 출생 즉시 완전한 인간인 것과 같다. 단지 성숙하게 성장할 뿐, 인간의 본질은 같다.


결론적으로, 전자(前者)는 완성되었으며 후자(後者)는 미완성으로, 완성과 미완성의 역설적 진리(paradoxical truth)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설명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상호 충돌하게 되며, 상호 충돌을 피하려고 할 때, 결과적으로 확증편향으로 인하여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저자는 구원은 ‘소유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이라고 했는데, 성경적인 구원에는 단회적이며 영원한 ‘소유개념’(중생)과 이 세상에서의(육신에 거하는 동안) 연속적이며 점진성의 임시적 ‘관계개념’(성화)의 양면성이 있다(요일 4:4-13; 요 8:47; 눅 15:11-31; 히 12:5-13).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소유개념)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쳤기 때문에 주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영생의 기업이 보장되며, 자신이 이 세상에서 평생을 통하여 범하는 자범죄에 관해서는 잠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듯하나(눅 15:11-31) 이 죄에 대하여는 징계를 받을 뿐(관계개념) 아들의 명분은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히 12:5-13).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혈육 관계(육신의 핏줄)가 어떠한 잘못에도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예수의 보혈(신령한 핏줄)로 맺어진 하나님의 소유 관계는 그의 절대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어떠한 것들, 즉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꾾을 수 없다는 것이다(롬 8:31-39). 그러므로 칼빈은 시종일관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롬 8:37; 요일 4:4; 5:4; 고전 13:7)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God's absolute sovereign grace)를 강조했다.


그러나 웨슬리(John Wesley)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라는 자기 자신의 언어(his own words)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라고 하여, 인간의 자유의지(the will of man)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주권적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신학적으로 이것에 대하여 구원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소위 신인협력설(synergism)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혹은 반알미니우스주의(semi-Arminianism)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에 계속되고 있는 논쟁의 본질(초점)이라고 본다. (참고: “성경난제 해석과 방법론”, CLC, pp 811-882, 2017) 



이창희 기자 <저작권자 헤드라인코리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