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가 다니던 그로브 개혁교회를 방문한 소강석 목사.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게 우리의 사역”.
저는 지난주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주요 일간지 기자단과 함께 미국 동부를 다녀왔습니다. 일정 중 제일 먼저 한 것이 언더우드와 그의 가족들이 다니던 그로브 개혁교회를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에 대한 꿈이 있다고 바로 선교 현장으로 올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지만, 선교사로서 실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명문대학인 뉴욕대학교를 입학합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은둔의 나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고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지원하였지만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교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장로님이 이 소식을 듣고 언더우드에게 5천 달러를 후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5천 달러면 오늘날 환산을 해보면 수십억에 이르는 돈입니다. 그 소식을 북장로교에 전달하자, 북장로교회는 마침내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로브 개혁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 묘소를 방문한 소강석 목사.
그가 도착한 조선은 은둔의 나라요 미지의 나라요 온갖 우상숭배의 나라였습니다. 그의 기도문에 보면 얼마나 그가 참담한 조선의 현실 모습을 보고 개탄하였는지 모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중략).”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절망과 개탄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까? “(상략)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하략).”
▲언더우드 선교사의 묘지.
그는 처음에 고아원 사역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민심이 흉흉한지 “키 큰 코쟁이 언더우드가 아이들을 미국에 팔아먹고 잡아먹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너무 험악한 인포데믹 가짜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거쳐 광혜원(훗날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 최초로 한국어 문법서를 출판하였고, 한국 최초로 한영사전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를 개척하고 경신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선교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콜레라가 창궐할 때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줬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그는 건강이 악화하여 미국 뉴저지로 돌아가서 요양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도 꿈에도 그리운 나라가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아들과 손주들까지 한국 선교사로 오지 않았습니까?
과연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것이 언더우드의 조선을 향한 선교였고 그 가문의 선교였습니다. 심장 속 불타는 곳이 그의 선교였다면, 저도 심장 속 불타는 곳이 저의 목회이고 설교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니,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