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안 노 찬
KINTEX 파나시아 대표이사
황학만 작가를 만나는 일은 마치 빈티지 오브제를 하나 발견하는 순간과 비슷했다. 오래된데, 낡지 않았다. 조용한데, 깊다. 그의 신작 〈장대재 비사〉는 그런 발견의 경험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 놓은 작품이다. 한국 기독교사의 오래 잊힌 장면들을,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읽어내는 하나의 비주얼 아카이브랄까.
그에게 장대재는 단순한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공기’에 가까운 장소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 순간 건넸던 성경 한 권, 그리고 그것이 우연처럼 흘러들어 간 평양의 한 여관, 벽지를 뜯어 올리며 들렸을 종이의 사각임까지—황학만은 이 모든 장면을 컬러 팔레트처럼 다룬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위기는 정확히 전달된다.
1907년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시선은 과거를 향하면서도 묘하게 현대적이다. 그는 그 역사적 사건을 종교적 영웅주의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나라가 가장 어두웠던 순간, 사람들은 새벽에 불을 켰다”라는 식의 미니멀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그의 말은 짧지만, 리듬이 있다.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장면이 떠오르는 방식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교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태양궁전’이 들어선 이야기였다. 슬픔이나 분노를 덧칠할 법한 장면이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몹시 차분한 목소리로 “복음은 공간보다 사람을 기억하죠”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의외로 세련되었고,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치 모노톤 룩에 한 가지 액세서리만 더해 완성된 스타일처럼.
인터뷰의 마지막, 그는 새로운 ‘최후의 만찬’프로젝트를 꺼냈다. 다빈치의 고전적 구도를 넘어서는 압도감보다는, “그날 밤 제자들의 마지막 표정과 공기를 담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예술보다 감정에 집중하는 방식. 순간의 습도, 온도, 시선 같은 것들. 그의 설명은 하나의 향수 광고처럼, 어떤 장면보다 더 생생했다.
황학만 작가의 예술은 요란하지 않다. 트렌드를 쫓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된 시간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다시 빛을 입힌다. 빈티지와 모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 듯, 역사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결국 ‘기억의 스타일링’에 가깝다. 우리가 잊고 지낸 이야기에 새로운 조명을 비추고, 지나간 장면을 지금의 무드로 재편집하는 일.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은근한 여운으로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역사를 되살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패션이든 예술이든, 결국 오래 남는 건 과하지 않은 것들이다.
황학만의 그림도 그렇다.
조용하고 단정하며, 무엇보다 오래 기억된다.
필자 안노찬
대한민국한식포럼 연합회장
KINTEX 파나시아 대표이사
한국프랜차이즈 경영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