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없는 사람"과 "영이 있는 사람"의 이중 창조?
오로지 어원학적 접근(etymological approach) 일변도로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면이 있다. 건전한 정통신학, 특히 개혁주의신학의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어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거의 대부분 성경을 잘 못 해석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어적인 해석은 기본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만 보고 디지털(digital) 방식으로, 총체적(입체적)이며 영적인 안목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맥에서부터 역사적 배경과 성경 전체적인 기본원리(the basic principle of the Bible)를 떠나 해석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원어해석에 있어서, 한 단어에도 수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유법(metaphor), 직유법(simile), 환유/전유법(metonymy), 제유법(synecdoche) 돈호법(apostrophe), 의인법(personification), 과장법(hyperbole), 의문법(interrogation), 반어법(irony), 완곡법(euphemism), 완서법(litotes), 용어법/췌언법(pleonasm), 중언법(hendiadys), 반복법(repetition) 등 수많은 비사들(figures)과 상징들(symbols), 표상(typology-archetype & ectype), 비유들(parables), 풍유(allegory), 동의어들(synonyms) 등과 관용어들(idioms),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 문장, 히브리 시들(Hebrew poems)에 있어서 평행법(parallelism)의 형식을 취하는 곳도 있으며, 그 외에도 문장에서 강조법, 도치법, 단어의 교호적 사용법 등등 수없이 많은 용법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무조건 무시하고 본문을 해석하다 보면, 잘 못 해석할 수가 있다.
물론 위와 같이 복잡한 해석방법을 다 알아서 성경을 해석하기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최소한도로 성경해석학적 도구들(tools)을 요약해서 (1) 문자/문법적 해석법(grammatical interpretation), (2) 역사적 해석법(historical interpretation), (3) 신학적 해석법(theological interpretation)에 (4) 성령의 도우심(Spiritual interpretation)을 받아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석의 비평(criticism)과 검증, 확인(confirmation)을 위해서 성경주석들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인 방법에 자신이 없으면, 건전한 주석들을 참고하며, 되도록 성경에 언급된 말씀 이상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평신도들의 경우에는 성경을 문장 그대로 이해한 후에, 반드시 건전한 성경주석에 의하여 검증을 받는 것이 좋다. 어떤 분의 강의내용 중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우려가 되어서 예를 들어 간단히 언급하려고 한다.
(1) 예를 들어, "영이 없는 사람"(창 1:26)과 "영이 있는 사람"(창 2:7)의 두 종류의 인간창조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단일창조(single creation, 말 2:15)에 반하므로 비성서적이며, 인간의 이중창조(double creation)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정통신학적인 성경해석으로 인죄론(Anthro-hamaltiology)과 구원론(Soteriology)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성경을 어원학적 방식에 있어서 사람과 짐승에 사용된 아사/야찰(asha/yachal, make/form, 창 1:25, 사 44:21)외에, 인간창조에 사용된 바라(bara, create)와 아사(asha, make)가 교호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만 보고, 성경의 원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서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단어에만 집착하다보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Adam)을 "창조하다"에 "아사"(make)를 사용했다가(창 1:26), 다시 동일한 사람(Adam)을 창조할 때에도 "바라"(create)를 사용했다(창 1:27). 물론, 원어에서 “자칼”(male/남성)과 “네케바하”(female/여성)으로 창조했다고 해서 혹자는 인간의 창조를 앞의 사람의 창조와 분리해서 다시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주장하는데, 여기의 남성과 여성은 앞의 사람의 창조에 대한 수식어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의 창 1:27의 동일한 창조행위에서 “창조했다”(created)의 표현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것(threefold repetition), 이것은 성경의 독특한 어법(peculiar phraseology)으로 현대진화론(modern evolution theories)에 대한 반대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창조에 관한 기사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면, 인간의 창조가 두 번(창 1장과 2장), 세 번(창 1:26/1:27, 2:7), 네 번(창 1:26, 1:27, 2:7, 2:21)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것은 같은 사람의 창조를 세분해서(detailed)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인간창조를 디지털 방식으로 보면 이 모두가 한 번의 단일창조로 보인다.
(2) 그리고 요 4:24의 "신령으로 예배하라" 혹은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영이 있는 사람"만이 예배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데, 여기서 이 "신령으로"(Greek: en pneumati) 즉 "in spirit"(no articles) 혹은 "in the Spirit"(NIV)에서 "신령으로" 혹은 "성령으로"의 "영"(spirit)은 문맥상 앞부분의 "하나님은 영이시라"(God is Spirit)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과 관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을 받아, 즉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함으로 예배하라는 뜻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진리"(truth)로 예배하라는 말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태여 "신령으로"(in spirit)를 우리의 영성(spirituality)과 관련시킨다 해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영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인간의 영이 있는 사람"의 예배를 언급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창 2:1-23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의 대략"(창 2:4)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의 순서와 시간과 공간 등을 초월해서 그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라 새로운 부분, 생략된 부분과 앞뒤 순서가 도치된 점을 고려해서 해석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기록방식을 모르고 성경을 해석할 때에 수많은 오류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되, 신학적으로 성경의 구조와 성경적으로 문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해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THE END
이창희 기자 <저작권자 ⓒ 헤드라인코리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