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교수 칼럼] ‘국민’을 이름으로 쓰는 정당들

[전대열 교수 칼럼] ‘국민’을 이름으로 쓰는 정당들

문형봉 2020-09-08 (화) 20:24 3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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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규모는 논할 필요도 없이 정부가 꾸며졌다. 봉건왕조를 필두로 정권을 군대의 힘으로 찬탈한 군사집단도 형식적인 정부 형태를 갖추지 않고서는 국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자의 입맛에 따른 구조로 정부는 꾸며지지만 모든 사람이 다 승복하는 것은 아니기에 언제나 반대세력을 의식해야만 했다. 여기서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찬성과 반대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를 다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소수세력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게 되는 원리다. 이처럼 찬성과 반대를 대표하는 집단이 결국 하나의 정파로 뭉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예전부터 정당이 형성되었다. 정당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을 갖게 된다.

공자가 정명(正名)을 주장한 것도 올바른 이름이 내재된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정당이 부침했다. 현대의 정당들은 치열한 토의를 거쳐 공식적인 당명을 사용한다. 미국은 역사가 짧은 나라면서도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양당체제는 2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지탱해오고 있다.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대결이며 일본은 자민당과 사회당이 맞장을 뜬다.


이념적으로 공산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부에서도 극히 제한적으로 거대 집권세력에서 용인하는 소수정당을 양념처럼 섞어 놨다. 대외적으로 “우리도 정당정치를 하고 있다”고 과시하려는 것이지 그들이 결코 정권의 일익을 담당하는 일은 없다.

한국의 역사에서 왕조시대의 정당은 노론 소론 등의 당파 이름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들의 치열한 대결은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 수많은 사화(士禍)로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허다했으며 강제로 나라를 뺏어간 일제는 이를 당파싸움이라고 규정하고 나라를 지킬 능력조차 없는 우매한 인간들의 정권욕으로 묘사하면서 식민지사관을 주입시켰다. 사화와 당쟁이 극심했던 것은 세습왕조가 가지고 있는 환경적 요인으로 임금의 지도능력 부족이 큰 원인 중의 하나였지만 이를 악용하는 아첨과 모략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말은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들면서 여기에 빌붙은 친미 친로 친일 등 자기의 이익만 챙기려는 조정대신들의 분열이 극에 달했을 때다. 결국 나라는 망했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쪽박 찬 신세면서도 파벌투쟁은 점차 가열되었다.


36년의 질곡을 헤어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맺음한 덕분이지만 미소의 승강이 속에서 우리나라는 38선으로 두 동강났고 6.25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남북으로 갈라진 채 어언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자유민주국가로 성장하여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나 북한은 3대세습의 공산독재국가로 핵을 개발 보유했다고 하지만 세계최빈국으로 전락해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정당은 노동당 일당체제에 김정은 일인독재지만 청우당이라는 이름의 천도교당도 존재한다.

한국은 해방 직후 미군정 하에서 400여개의 정당이 난립했으며 공산당을 비롯한 공산이념 정당들도 다수 등록했다. 정부수립 이후 집권여당으로 자유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락펴락했지만 3.15부정선거로 모두 쫓겨났다. 4.19혁명이 성공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박정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공화당이 정권의 핵심이 되었다.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던 민주당은 고질적인 구파 신파싸움으로 지리멸렬하여 구파는 신민당으로 갈라섰다. 이 때 부터 우리나라 정당사는 가히 춘추전국시대가 된다. 별별 이름의 정당들이 깃발을 올린다. 지난번 총선에서 여당의 꼼수로 연동형 선거법이 통과되자 선관위 등록정당이 50개가 넘었다. 큰 정당의 위성정당까지 나왔다.
 

안철수는 없어진 ‘국민의당’을 복원시켰고 미래통합당은 이번에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바꿨다. 국민의당과 국민의힘은 유권자를 혼란시키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이미 국민의힘으로 창당준비등록까지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시일이 끝나 무효가 되었고 시민단체 중에도 같은 이름이 있었으나 활동이 미미하여 거론이 안 된다.

국민의당은 안철수가 창안자가 아니다. 4.19혁명 이후 유명 인사들의 정치참여도가 높아지면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분이 가인 김병로선생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의 변호를 도맡아했던 인물로 이승만 비판의 선봉이었지만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사법부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는 칭송을 받는다. 그가 만든 정당이 국민의당이다. 그는 고향인 전북순창에서 7.29총선에 출마했으나 홍영기에게 떨어진다. 전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아도 무조건 당선할 것이라는 참모들의 말만 믿고 전국유세를 다니며 자기 선거구에는 한 차례도 유세를 하지 않았다. 가인의 국민의당은 이렇게 망했다. 그 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선생이 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임했으나 실패했다. 김종인은 가인의 친손자다. 그가 조부가 썼던 국민을 당명으로 받아드렸으면 안철수의 국민과 어떤 조화(調和)를 이룰지 자못 궁금한 대목이다. 서울과 부산시장 보선이 초미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문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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