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기 성 목사
일반 언론과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핵심은 신앙의 가치이다. 기독교 신앙의 바른 가치를 가져야 하고, 보존해야 하며, 그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촌철(寸鐵)과 같은 언론인의 사명보다 기독교의 가치를 먼저 인지하여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의식이 없다면 필(筆)을 꺽어 버리는 것이 좋다.
한국교회는 눈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 언론은 눈을 달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달리는 차에 비유하자면 핸들이 보이지 않고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과 같다. 한국의 교회들도 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기에 기독언론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
자리를 잡아야 한다. 눈을 달고, 방향타를 잡고, 브레이크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행사장에 등장하는 많은 기독 언론인들을 만나보면 전혀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영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번뜩이는 눈이 없어서 그러하다. 어찌 된 일인지 비판하는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노래만 부른다. 그것도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부르기에 좋고 쉬운 것이 아닌데 말이다.
권세를 가진 자를 무조건 높이는 도가 지나친 발언을 ‘용비어천가’라고 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자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어용’이라 한다. 민주화 시대에 ‘어용교수’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그들은 비난받았다. 정부예찬론을 펼쳤지만 정부가 국민의 기대심리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발이 더 심했다.
1968년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로버트 로젠탈 교수의 이론을 ‘로젠탈 효과’라고 하는데 이는 ‘피그말리온 효과, 기대효과’와 같은 의미이다. 칭찬과 기대심리는 사람들의 부응심리와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내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될 때 역효과가 발생하는데 이를 ‘골렘효과’라고 한다.
기사가 칭찬 일변도이다. ‘그분은 능력이 탁월한 분, 내가 만나본 최고의 실력가,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 상상을 초월한 인물’ 등의 용비어천가를 계속 부른다. 그 기사의 대상자는 어떤 감정인지 모르지만 지나친 기대감이 오히려 역효과가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중단시켜야 한다. 그가 진정한 지도자이며 이 시대의 리더이기를 원하다면 말이다.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향한 용비어천가는 부르면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성도’를 만들거나 교회 분열과 목회자 불신의 심각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 역사적인 교훈이다. 장로를 비롯한 중직자들이 지나친 발언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발언이 아픔일 수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선을 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회사의 대표가 한 직원을 지나치게 칭찬하며 편애하면 그 직원은 자진 퇴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한다. 골렘효과가 생기지 않는 지혜로운 칭찬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되 ‘어용발언’은 하지 말아야 존경을 받게 된다.
아울러 기독언론은 윤리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알만한 인물 가운데 윤리적인 흠결이 너무 많이 드러난 자들이 있다. 왜 그들에게 날카롭지 아니한가 묻지 아니할 수 없다. 언론은 비굴하지 말아야 한다. 잠입취재, 잠복취재, 기획취재와 같은 특수한 취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안하고 또 평안하고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기독 언론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세상은 기독교의 문제점을 파고들고 캐낸다. 그 결과 교회와 기독교가 폄하된다. 그래도 기독언론은 이상하리만큼 잘 참고 침묵한다. 세상이 파고드는 그 문제를 기독언론은 왜 파고들이 못하는 것인가? 더 심각하게 기획하고 준비하고 밝혀내야 한다.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 세상이 기독교를 단죄하기 전에 기독 언론이 방어하면서도 폐부를 드러낸다면 흔히 말하는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까?
언젠가 인천의 한 교회에서 그루밍 성범죄가 고발되었다. 피의자는 담임 목사의 아들 목사였다. 그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후에 피해자들에 대한 구호 조치나 피의자에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법적인 처분을 제대로 받았는지 취재되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의 행위로 치부하는 그 교회의 분위기도 현장의 눈물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범죄는 그 교회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지금도 그와 유사한 범죄는 이어지고 있다.
기독 언론이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힘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파서 우는 자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아프게 한 사람의 이야기도 듣겠지만 아픈 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정치인들처럼 ‘패거리 의식’은 쓰레기 통에서 조차도 찾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 언론이다. 기독교의 가치관을 따라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피의자도 울고, 피해자도 울고 있다. 한국교회가 울고 있다. 그런데 기독 언론인들은 웃고 있다. 최대의 아이러니이다.
한국 기독교의 난제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이것도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곳이다. ‘유해종교’의 문제이다. 이단과 사이비로 낙인찍힌 곳들의 아픔이다. 일부 편협한 시각의 목회자들에 의해서 제단 되어진 이단이 아닌데 이단이 된 곳도 있다. ‘이단이 아니라 형제였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한 교단이 이단을 해제하겠다는 정책을 통하여 몇 군데를 선정하고 이단을 해제하려다가 헤프닝으로 끝난 사건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한국교회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그 현장, 눈물을 글썽이던 그 현장에 수 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헤프닝’으로 보도하고 마감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잘못을 고백한 그들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한 보도가 없다. 그들을 취재하면 같이 이단으로 취급받을 것이 두려운 것인지, 낙인이 겁이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 있다. ‘Fact Check’가 없었다.
언론인의 시각에서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정말 낙인이 찍힌 그들이 ‘유해(有害)종교인지 단순한 실수인지, 복음의 다양성인지 사기성인지, 성경해석 방법의 차이인지 속임수인지’에 관한 종합적이고 심도(深度)있는 분석이 있어야 한다.
이 역시 힘을 빼고 해야 한다. 언론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빙산의 일각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감춰진 부분을 발견해 내어야 한다. 물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하지만, 도전해야 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처럼, 낙인이 찍히면 사회 공동체에서 삶을 유지하기가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기독 언론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작은 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크고 멀리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어두운 곳을 찾아가야 한다. 음지에 들어가서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유해종교’ 논란과 관련한 녹음파일이 있다. 흔히 말하는 손발을 맞춰서 이단을 만들자고 했던 그 파일이다. 그것이 Fact라면 그 당사자는 더이상 이단연구가라 할 수 없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앉아야 한다. 모 교단의 이단사이비 대책위원장은 타인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누군가 가져다 주는 밑줄친 내용만 가지고 정상적인 사람을 이단으로 몰았던 경우도 있다. 한글의 해독능력이 없는 이가 어떻게 이단 사이비를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실소(失笑)를 금치 못한 대국민 사기극과 같은 일이 있었다.
이 때 기독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양자의 입장을 정확하게 심층취재하고 보도하는 일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하지 아니했다. 이즈음에 기독 언론은 자기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마치 빚진자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 언론은 기독교에 대한 ‘Fact Check’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짜를 걸러내기 위해서이다. 거짓 뉴스를 양산하지도 말아야 한다. 중립을 지키면서도 기독교의 가치관을 높여야 한다. 종교 권력 앞에 당당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이다.
일반 언론에 뒤지지 말아야 한다. 기사의 실력으로 말이다. 논조가 살아야 한다. 글에 힘이 있어야 한다. 흔들림이 없고 지워지지 않는 잉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기독교를 살릴 수 있다. 세상의 모욕을 칭찬으로 바꿀 수 있다. 비난을 받아도 비판당하지 않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기독 언론은 저마다 조직을 만들어서 포풀리즘을 자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연합하고 협력하고 하나가 되어서 서로 격려해야 한다. 기독 언론에 있어서 메이저와 마이너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도 사라져야 한다. 재력과 권력이 있는 언론이 시장을 지배하고자 하는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힘을 빼고 우는자와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메이저이다. 그래서 기독 언론의 나아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그러나 헤쳐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조선의 아픔, 대한제국의 아픔에 기독 언론인들이 생명을 걸고 나아갔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심정으로 펜을 들어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기독 언론의 사명이 부활되기를 목마른 사슴처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