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영 박사 칼럼,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장부영 박사 칼럼,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창희 2021-04-11 (일) 16:11 3년전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Gray hair takes a shorter way knowing itself in advance)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는 이 구절은 고려말 정치가이며, 유명한 시성(詩聖)인 정철(1536~1593)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가사집(歌詞集)에 수록된 시조의 한 구절이다. 이 시조는 정철보다 약 3세기나 앞선 고려말 성리학자 우탁(禹倬, 1262~1342)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조(時調)인 탄로가(嘆老歌)로, 인생이 늙는 것을 한탄하는 시조 중의 한 구절이다. 


한 손에 가시 쥐고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오늘날 호르몬 요법, 유전자 공학 등 첨단의학으로 사람이 늙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며 심지어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그것도 허사가 아닌가? 성형수술을 통하여 외모를 젊게 보이려고 하지만, 사람의 속은 속절없이 늙어 죽어가고 있음을 누군들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를 한탄하여 우탁(禹倬)도 속절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읊은 시가 바로 “한 손에 가시 쥐고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는 시이다. 


이에 대해서 성경(Bible)은 이미 인생이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했고(히 9:27), 사도 바울도 우리의 몸은 후패하여 썩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로 거듭나서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명을 얻으라고 했다. 인간은 이미 범죄로 인하여 숙명적으로 후패하며 죽게 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성령(Holy Spirit)으로 거듭나면 영원히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永生)에 이른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외쳤다.


성경에 보면, 아주 옛날, 즉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인간이 수백 년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이 930세, 므두셀라는 969세로 인류역사상 최장수로 살았고, 그 후에 노아(Noah)도 950세로 오늘날 평균수명의 열 배 이상을 살았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마 비유를 들자면, 싱싱한 나뭇가지를 자른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싱싱함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오늘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유전공학적으로 인간의 나이를 늘려보려고 애를 쓰지만, 현재로서는 100년을 넘기기도 힘든 것 같다. 


물론 예외로 100세 이상을 산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하다. 한국에도 어느 할머니가 122세로 지금도 살아계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과학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과거 사람들의 자연수명(自然壽命)을 추월하지 못하니 이 또한 인생무상(人生無相)이 아니던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예수님 바로 뒤 시대인 고대 삼국시대의 가야 왕이었던 김수로왕도 158세까지 자연수명을 누리지 않았던가? 앞으로 평균 백세 시대가 온다는데,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아담이 죽은 지 한참 후에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나타난 모세의 인생무상함에 대한 노래를 들어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라고 인생무상함을 읊으며 우리의 날을 잘 계수(계산)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시 90:10~12)을 보면, 우리 인류의 평균수명이 100년도 못 되는 무상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현재 102세 되는 노장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외계에서 온 사람 모양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말씀을 쏟아낸다.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에 그는 “글쎄 저는 안 늙어 봐서...”라고 말해서 속세에 사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는 늙었다는 생각도, 늙지도 않고, 안 늙을 수도 있다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아마 이것이 그가 장수하는 첫 비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 장수의 비결뿐만 아니라 인생의 행복의 비결이 이 같은 “생각의 변화”(thinking shift)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즉 긍정적인 사고의 방식 말이다. 


물론, 일부로부터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는 가운데 “긍정의 힘”과 “긍정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레이크우드교회(Lakewood Church)의 조엘 오스틴(Joel Osteen)과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가 있다. 오스틴 목사는 “긍정의 힘”(Your Best Life Now)인 “당신은 지금 최선의 삶을 살라”는 책에서 긍정적인 힘은 자신의 최선의 삶에서 나온다고 했으며, 슐러 목사는 “생각의 능력”(Power Thoughts)라는 책에서 “긍정적인 생각”(positive thinking)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도 긍정적인 생각(positive thinking)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지, “안된다”라는 부정적인 생각(negative thinking)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는 절대로 역사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 또는 가능성의 사고(possibility thinking)는 기독교 세계에서만 아니라 비기독교 세계에서까지 통용된다는 것이다. 멀게는 미국에서 한 참 불황과 정신적 침체에서 암울한 시대(the Great Depression)를 보내고 있던 1930년대 개혁교회 목사였던,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적극적 사고의 능력”(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을 역설함으로써 국민을 일깨웠다.


이렇게 젊다는 생각은 대부분 노인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사고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인들과 대화해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젊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 스스로는 마음이 젊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늙은 생각, 말하자면 구시대적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왜냐하면, 노인들이 말씀하시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구시대적인 생각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이를 “꼰대”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젊은이들 역시 말하는 것을 보면, 은연중에 “꼰대”의 생각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이만 젊었다고 신세대 사람인 양 행세를 하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은 저 멀리 과거의 프레임(frame)에 갇혀있지 않은가? 물론, 나이가 젊을수록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고 잘 적응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두가 “꼰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모 출판사의 사장님이신 박 박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인사도 할 겨를도 없이 다자 고자로 필자의 글을 출판하겠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출판하려고 집필한 책의 원본을 친구 목사님을 통하여 일부를 읽어보셨다고 하시면서 장장 900여 페이지가 넘는 성경과 신학에 관한 책(heavy work)을 출판하시겠다면서 당장 만나자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목사님과 함께 출판사로 찾아갔다. 물론, 출판사 사장이신 박 박사님과는 초면이다. 


그런데 박 박사님이 필자를 보자마자 “아이고! 연세가 있으시군요?”라고 첫 일성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가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필자의 글을 읽어보고 아주 젊은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쓴 글에 젊음이 배어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뜻밖에 신기해서 “그래요?”라고 하면서 웃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럴 것이 글 속에서 표현의 언어와 문장뿐만 아니라 “신선한 생각들”(fresh thoughts)이 배어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필자는 미국 유학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서부터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영어도 배우고 서양문화(Western culture)를 익히다가 오래전 40대 늦게서야 유학으로 미국에 와서 그동안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현대문화와 신학과 각 분야에서 첨단 학문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고, 학교의 대형도서관들을 찾아다니며 좀 더 세계를 알기 위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탐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학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어찌 보면 지식에, 굶주린 사자 모양으로 뛰어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도 지식에 미천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세상을 알기 위하여 성경과 신학은 물론 현대 학문과 문화를 따라가다 보니 아마도 필자의 글 속에서 현대감각이 배어 나온 모양이다. 물론, 필자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핵심인 과거의 “전통”(tradition)과 더불어 진보주의(progressivism)의 핵심인 현대의 “유행”(fashion)의 극단화를 피하고 상호 견제하며 성경의 진리인 개혁 사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개혁 사상은 중도(中道)로 오해하고 있는 세상의 개혁 사상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말하는 “상대적 진리”(relative truth)에 의한 “중도”(the midway)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절대적 진리”(Absolute Truth)에 의한, 전문용어로 “중보”(the Mediator)를 의미한다. 이 중보의 진리는 성경과 신학의 핵심이다.


다음으로, 어느 정도 늙는 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젊게 말하며 운동하고, 젊게 행동하며 사는 생활이다. 물론,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말과 행동을 젊은이들과 똑같이 하다가 오히려 어색하거나 몸을 다쳐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의 건강상태를 잘 조절해가며, 젊은이들과 같이 움직이고 활동하게 되면 어느 정도 심신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한 방법으로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생활이다. 말은 빨리하고, 그리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고, 허리와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빠르게 걸어 다닌다면, 남이 보기에도 어느 정도 “꼰대”라는 별명을 듣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다가 젊은이들 이상으로 컴퓨팅에 능하고 현대 지식에 충만하여 지혜가 번득이면 젊은이들에게 최소한 “꼰대”라는 놀림거리는 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의 경우에는 컴퓨터를 사용한 지도 수십 년이나 되며, 인터넷과 웹을 운영한 지도 오래되고, 컴퓨터 공학(computer technology)과 컴퓨터에 관한 온갖 지식을 섭렵하다 보니, 오히려 젊은이들이 물어볼 정도라선지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생물학적 (biological body)몸은 어쩔 수 없이 늙어가지만, 몸의 활동과 정신건강(mental hygiene)을 잘 챙기다 보면, 이 세상을 젊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아주 좋은 방법의 하나는 현대정보(current information-its updated intelligence)를 많이 접하고 그 정보들을 소스(source)로 하여 글을 많이 쓰는 방법이다. 글을 많이 쓸수록 우선 뇌(brain)가 젊어지고 치매(dementia)도 예방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젊은 시절의 사랑(eros love)과 플라톤의 이상적 사랑(Platonic ideal love)을 승화시켜 하나님의 아가페(Agape Love) 사랑을 통한, 사후에 전혀 늙지도 않고 죽음도 없는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the hope of  God’s promise)이 넘치지 않겠는가?


이창희 기자 <저작권자 헤드라인코리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